공동육아 어린이집 부모 후기 시리즈2

아이 셋을 공동육아로 키운 이야기

공동육아 어린이집 부모 후기 시리즈2

나는 세 아이를 낳은 전업주부 입니다 

이제 육아는 제법 졸업한 듯 하고, 열살 된 큰 아이와 다음을 상상해야하는 시점이 되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먼저 육아 인생을 정리해보려고요.

저는 세 아이를 낳은 전업주부입니다. 열정이 기고만장 하던 때였죠. 아이가 열 살이 된 이제서야 “아이 돌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맞다.”고 인정합니다. 밤만 되면 녹초가 되어버리니까요.

2012년 봄, 결혼식을 한 달도 남기지 않고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는 주말부부가 되기 위해 서울에 집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그걸 아신 시부모님이 “떨어져 살거면 왜 결혼하니?”라며 결혼을 반대하고, 저희를 나무라셨어요. 우리는 서른 먹은 어린애들이었거든요. 이 사람이랑 결혼은 너무 하고 싶고, 부모님의 말은 거역하지는 못하고. 둘이 붙잡고 눈물의 밤을 며칠씩 보낸 후, 제가 직장을 포기하기로 하고, 시골의 한 아파트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큰 아이를 낳은 건 결혼 직후였습니다. 신혼은 달콤하기는 커녕, 소주를 들이부은 것 같은 입덧에 구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시달렸습니다. 후각이 특히 둔한 편인데 이렇게 다양한 냄새들을 맡은 것 자체가 처음이었죠.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가 어려웠어요. 잠은 왜 이렇게 오던지. (그때 책 읽고, 영어 공부 하지 않은 게 지금도 후회...)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구요. 빙빙 어지러워서.

그렇게 첫째가 태어났습니다. 첫째가 50일쯤 되었을 때, 남편은 직장을 영등포로 옮겼어요. 저희도 따라서 근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퐁당퐁당퐁퐁당’ 일주일에 세번 혹은 네번 당직이라는 말도 안되는 스케쥴을 소화해내야 했기에 저는 늘 아이와 둘이었죠.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 줄 몰라서, 개월수에 맞는 놀잇감을 검색해서 중고나라로 구입하고, 그마저도 불충분하다 싶으면 새로 샀죠. 인터넷에 의지해서 모든 육아를 해냈어요. 제일 나은 기저귀, 분유, 분유병, 보온병, 기저귀 가방, 분유포트, 젖병소독기, 유모차, 카시트 뭐 하나 마련할 때도 인터넷을 며칠씩 들여다보며 겨우 해냈어요. 아이와의 외출, 아이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전혀 몰랐구요.

아직 어른밥 짓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서 내 밥 차려먹는 것도 너무나 어려웠어요. 그래도 아이 이유식은 해야하니, 가까운 생협이나 유기농마트 같은데서 재료를 공수하고 저는 이유식 끓이고 남은 채소를 넣은 라면만 계속 먹고. 그때 인생의 라면을 다 먹은 것 같아요 ㅎㅎㅎ

남편 퇴근이 어찌나 기다려 지던지요. 아이와 전 남편이 퇴근하는 날이면 꼭 남편의 회사 앞으로 갔어요. 집에서 2.5키로 떨어진 남편의 직장까지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걸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하는 말이 딱 맞았죠. 어깨는 내려 앉을 것 같고, 허리는 아프고, 아이는 떨어뜨려 놓을 수도 없고. 남편이 유일한 동앗줄 같아서 일분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회사 앞 파리바게뜨, 본죽 이런데 엄청 많이 갔어요.

한 번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어요. 큰 아이는 유모차 거부가 심했어요. 디럭스는 거의 못태웠고, 휴대용 넘어가서 그나마 타고 다녔죠 ㅎㅎ 짐수레 수준. 그날은 어쩌다 아이가 유모차에 누운 채로 잠이 들어서 아파트에서 백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어느 한가한 골목을 산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깨서 울기 시작한 거에요. 완전 혼비백산 했죠. 얼러도 계속 뒤로 넘어가면서 울기만 하는 애를 감당을 못하겠는거에요. 마침 아기띠도 없었고, 한쪽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유모차를 밀기에는 너무 무섭더라고요. 아이가 다칠 것만 같아서.

그때 한 중년 아저씨가 저한테 고래고함을 치더군요. 아이 우는 게 시끄럽다면서. 그날 기억이 정말 끔찍하게 안 사라져요. 런닝에 파자마 바람으로 거리에 나와서는 공중도덕 운운하며 우는 아이와 그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 그날 엉엉 울면서 새벽까지 혼자 맥주를 마셨더랬죠. 아이는 뽀로로에 맡겨두고요. 그 때문인지 그 마을에 정이 붙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남편 직장을 따라 또 한번 인천으로 이사를 해야했을 땐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았어요.

 

남편이 직장을 옮겼지만 퐁당퐁당퐁퐁당은 끝날줄을 몰랐고, 우린 인천에서도 그렇게 남편의 직장에 갔어요. 아이는 회사 지하상가에서 걸음마를 배웠고, 상가 편의점에서 장난감 구경을 하고, 상가 중식당에서 저염 게살죽을 먹으며 자랐어요. 그때부터 육아에 제가 점점 몰입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신혼 때 장만했던 텔레비전을 버리고 육아서를 사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맘 때 제일 인상적인 내용이 훈육보다는 아이의 욕구를 기다려주라는 것이었어요. 전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이걸 그냥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까 아이가 욕구를 조절하는 힘을 점점 잃더라구요. 떼쟁이가 되었고 정말 그 후로 첫째와 저의 긴긴 싸움이 이어졌어요. (육아는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인데! 어떻게 그 책과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냐구요!!)

드디어 어린이집을 알아보다

그렇게, 아이에게 완전히 몰입해 있을 즈음 어린이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둘째가 왔거든요. 둘째는 제 아이 집착을 해결해 줄 유일한 열쇠처럼 보였어요. 친정과 시가가 모두 먼 인천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물론 하루가 멀다하고 친정에 왔다갔다 하긴 했지만- 저의 미래가 정말 막막하더라구요.(완전 우울. 전에 했던 일로 돌아가는 것도 싫었고.) 같이 얘기나눌 사람 하나 없다는 것도 답답했구요. ‘한가하면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남편을 설득해 빨리 둘째를 가졌죠. 두살 터울로 두번째 아이가 태어났어요.

셀프-라이딩 가능하다고 치고, 근방 5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싹 다 알아보고 열군데 넘게 면담을 갔어요. 그때 맘까페에서 추천하는 어린이집 중 한군데 티오가 있어서 다니게 되었어요. 그곳 원장님은 입소면담에서 ‘아이에게 맞춤’으로 ‘자상하게 잘돌봐주겠다’고 말씀하셨죠. 결과적으로 이 어린이집에 15일 다녔어요. ㅠ_ㅠ 아이 적응기여서, 낮잠 전에 데리러 갈 때였어요. 그날 제가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어린이집에 도착했나봐요. 세살들 방에서 엄청나게 큰 음악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여쭈어봤더니, 같은 시간에 네살들은 활동이 있어서, 세살 아이들 수면을 방해하기 때문에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다고 하더라구요. 이해가 되시나요? 바로 옆방에서 노는 아이들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그보다 더 큰 음악소리를 틀어놓는다는 것이. 정말 귀를 때린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어요. 더 무서운 건 아이들이 그 상황에서 자고 있었다는 거였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지 지금도 의문스러워요.

문제제기를 하고 상담을 요청했어요. 그 상담에서 담임선생님은 ‘그건 아이들 발달에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면서, 전혀 관계 없는 ‘아이 기저귀 떼는 문제’를 말씀하시더라구요. 그 기관에서는 5월과 9월 기저귀떼는 연습을 하는데 언제를 원하시냐고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배변이 그렇게 일률적으로 훈련 가능한 것인가요?

그밖에 여차여차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고, 이주일만에 거기를 나오게 되었어요. 그때 기관의 중요성을 처음 생각하게 되었어요. 자는 시간 빼면, 집보다 오래 머무를 수도 있는 공간인데. 다시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했고, 4살때 발도르프 어린이집에 정착했어요.

발도르프 어린이집에 정착할 수 있을까?

제가 어린이집 알아볼 때 한 가지 기준으로 삼았던 게 “장애통합 가능”이었거든요. 평균적으로 10%정도의 인구가 장애인이라고 해요. 우리가 장애인들을 흔히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대부분 집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라고 하고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함께 키우는 어린이집이라면, 아이들이 가져야할 태도나 사회적 인식을 잘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거였죠. 그 발도르프 기관도 그런 점에서 좋았어요. 처음 원장선생님이랑 면담한 날, 양육자의 힘듦을 알아주는 따뜻한 말들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도 했죠. 첫째 아이는 그곳에 4살부터 2년 동안, 둘째 아이는 3살부터 1년 간 다녔어요.

둘째 아이가 일찍 기관에 간 건, 저희가 셋째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었어요. 둘째 낳고 부터는 인천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서 육아 친구들도 두서너명 있었어요. 힘들 때 아이를 서로 돌봐준다던가, 서로의 집에 가서 차 한잔 마시며 수다를 떤다던가, 함께 놀이공원이나 키즈까페를 간다던가 하는 일이 가능해졌죠. 친구가 친구를 만들어서 동네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하고요.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게 [자아실현 혹은 직업 혹은 재교육]에 대한 욕구더라구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는 엄청 젊었는데- 이렇게 살다가 아이만 키우다 인생이 끝난 것 같은, 제대로 된 삶은 살아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번째 아이를 계획했어요.

그런데 세번째 아이를 낳았다니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때 저한테는 아이가 구원처럼 느껴졌어요. 아이가 나를 원할 때, 나에게서 사랑이나 기쁨을 얻어갈 때, 육아나 양육에 집중할 때 우울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요. 또, [아이 셋]에 대한 판타지 같은 꿈도 있었는데, ‘그 꿈이라도 실현하자!’, ‘될대로 되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구요. 물론, 근원적인 해결은 없었기에 셋째를 낳고난 이후 완전히 멘탈이 무너져 약한 우울증이 오기는 했지만요. ㅎㅎ

어쨌든 셋째는 둘째가 낳았다 할 정도로 둘째는 순하고 손이 거의 안가는 아이였어요. 밥도 잘 먹고. 구개열이 있어서 돌이 지나자마자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했는데, 그 수술을 기다리는 아이 중에 살이 통통하게 붙은 아이는 저희 딸 밖에 없었어요. 그게 특수 젖병으로 젖을 먹어야 하고, 이유식 삼키기도 고되서 먹기가 힘든 부분이 있거든요. (지금도 딸 생각하니 흐믓하니 행복하네요.)

아이들이 다녔던 기관에서 일이 터진 건 아이들이 그곳에 다니고 일년 반 뒤였어요. 큰 아이랑 같은 반에 보내고 있는 엄마가 기관을 옮긴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 아이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관은 통합아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교사대 아동 비율이 1:15에 달했고, 보조교사 한 명이 두 반을 서브하고 있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보호자 말에 의하면) 담임교사가 양육자에게 아이 돌보는 어려움을 계속 토로했대요. 교사 입장도 너무나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어요. 이 아이가 대소변 가리는데 어려움이 있고, 계속 울고 소리를 지르니까 교사도 부모에게 얘기하는 방법밖에 없었나봐요. 뒤처리가 완전히 되지 않은 속옷 이 냄새나는 상태로 아이가방에 담겨 집에 오고 하니까, 부모도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른 기관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 때는 살짝 배신감 가까운 감정이 들더라구요. 왜 기관차원에서 이 아이를 돌보지 않았는지, 담임에게만 그 아이에 대한 돌봄을 떠미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담임 교사 입장까지 고려하지 못하고, 죄송하게도 원장님께 면담을 신청했어요. 그런데, 원장님은 기관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를 야속하게 생각하시더라구요. 결국 갈등의 폭을 줄이지 못하고, 그 이후로 아이들을 보내지 않게 되었어요. 셋째 만삭 때에 일어난 일이었죠.

교육기관 대신 마을을 알아보다

저희는 이사를 하기로 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정착지 탐색이 시작되었죠. ‘마을’이 중요했어요. 아이 키울 때, 따뜻한 이웃이 얼마나 절실한지 아이들이 자유롭게 웃고 떠들 수 있는 다정한 공간이 얼마나 간절한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교육기관 중심으로 마을이 만들어져 있는 데를 마구 찾았어요. 먼저 발도르프 기관 근처 동네를 쭉 찾아봤고, 자연환경이 좋아보이는 김포나 파주 등지도 가보고, 교육환경이 좋다는 일산이랑 광명도 가보고 했죠. 마을이 있다는 목동이랑 상도동도 가봤어요. 결국 망원동에 집을 계약했어요. 저의 본가가 마포기도 했고, 마포구 성산동 부근에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이사 올 때까지는, 그 동네에 살면 마을사람이 되는 것이지 마을에 산다는 것이 별건가 했거든요. 근데 그것 참 별거더라구요.

아이 돌봄 기관을 찾는 것이 급했어요. 발도르프 기관에서 나오고 나서 그곳에 대한 상심이 커서인지, 좋고 이름난 교육을 하는 기관을 찾는 것보다 직접 찾아가서 “그” 기관의 교육 방식을 보고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곧 가까운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방문했어요. 유치원은 아이들을 30-40분 정도 작은 의자에 앉혀놓고, 학교 같은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하더라고요. 아이들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저희의 양육 방식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고집을 부리는 것 중에 하나는 통합교육이 있고, 두번째는 적기교육이 있거든요.

저는 적기교육 굉장히 선진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핵심은 아이들이 스스로 깨칠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과 교권을 인정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아주 단순하게 교사가 제공하는 교과 과정보다 먼저 가르치지 않는 거에요. 물론 교과과정보다 뒤쳐졌을 때는 교사가 도움을 줄 수 있겠고, 교사가 가정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죠, 하지만 [학교 교과 과정보다 절대 앞서지 않는다.] 다시 말해, 무리해서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먼저 배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교권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태도로서 익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이 되는데 아주아주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다 공동육아를 만나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공동육아를 만났어요.마포 서부권인 성산동-합정동에는 네군데의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모여 있는데, 비슷한 가치관과 조금씩 다른 개성을 갖고 있어요. 그 중 한 군데에 저희 가족도 다니고 있고요. 첫째가 여섯살이 되던 해부터 다녀서 이제 막내가 여섯살이 되었으니 5년을 공동육아 조합원으로 살고 있네요.

“공동육아”를 들어보기는 했거든요. 그때 전 막연히 부모들끼리 돌아가면서 품앗이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절대 그걸 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설명회에서 공동육아가 과학적 교육관에 의해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저의 교육관이랑 완전히 일치했어요.

아이들은 신나게 놀면서 스스로 관계성을 터득할 수 있고, 거기서 지혜와 꾀를 배워요. 교사는 아이들의 갈등이 깊어질 때만 개입할 뿐 아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창의적인 놀이를 장려하고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해요. 더불어 생활방식에 대한 규칙, 서로에 대한 약속을 어떻게 지켜나가는지에 대해서 배우죠. 아이들은 이런 인정받고 옹호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롭지만 자기 조절력이 강한 아이들로 성장해 나가요. 자랄 수록 더 강한 아이로 자라요.

일곱살 아이들 중에도 한글을 못깨친 아이들이 많은데, (저희 딸은 여덟살인데 한글 깨치는 중입니다 :) 첫째도 여덟살 후반부에 갑자기 한글을 깨쳤구요.) “내 친구가 할 줄 아니까 괜찮아.”라고 말합니다. “배우고 싶어”라고 말하는 아이는 들어봤어도, “쟤는 할 줄 아는데, 나는 몰라서 부끄러워. 질투나.”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아직까지 별로 본 적이 없어요. 경쟁보다는 협력을 가르치고, 아이들 인권만큼 교권이 인정받는 분위기 속에서 질서와 권리, 자유를 동시에 배워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이집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없어요. (때때로 등원거부는 있어요. 그런데 적응 실패한 사례는 5년 동안 단 한번도 못봤어요.) 공동육아는 부모참여가 기본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교사와 부모의 별칭을 부르고 평어(반말)를 사용하거든요. 이런 걸 “어른친구”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아이들에게 멘토와 코치도 아닌 “어른친구”가 얼마나 값질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 같아요. 또, 어른들에게도 수십명의 “아이 친구”가 생기죠. 만약 길에서 “누구. 안녕”하는 인사를 듣는다면 귀여워서 까무라치실지도 몰라요.

에구, 정리하다보니. 마음이 좀 뻐근하고 뿌듯하네요. 내 아이 참 잘컸다 생각이 들고, (친구들은 미쳤다고 하지만) 저는 이 아이들의 사춘기가 얼마나 지랄맞고 상큼할지 너무나 기대가 됩니다. 이제 아이를 키우며 속끓이며 걱정하는 밤들이 무척 설레고 즐겁습니다. 아이와의 대화도 늘 무난하거나 즐겁구요. 즐겁고 행복한 육아, 앞으로는 즐겁고 행복한 교육이겠죠. 저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생각해요. 양육자에게 짐을 지우는 말이죠. 그래서 [아이와 함께 사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해요. 나랑 같이 사는 무궁하게 귀여운 철학가 꼬맹이들.